이름
조영남 (趙英男, Jo Young-nam)
출생
1945년 5월 13일(음력 1945년 4월 2일, 75세)
일본령 조선 황해도 평산군
본관
배천 조씨
국적
대한민국
신체
O형
학력
강문고등학교
한양대학교 성악과 중퇴
서울대학교 성악과 명예학사
트리니티 신학대학교 학사
병역
육군 병장 만기전역
데뷔
1968년 노래 '딜라일라'
종교
개신교
가족
동생 성악가 겸 교수 조영수
거주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
1963년 말 데뷔해 한국 대중음악과 성악을 가요에 접목시켜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가수. 사실 본업인 음악 뿐 아니라 작가, 화가, 방송인, 라디오 DJ 등 다방면으로 활동해왔다. 솔비나 구혜선, 홍서범 등도 종합 예술인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이들보다 앞선 조영남이 원조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실상은 성희롱이나 각종 사건사고, 그림 대작 등 여러가지 구설수나 계속해서 만들어대는 트러블 메이커로 더 유명한 사람이다.
황해도 출신이라 분단의 아픔과 지역감정의 대립 등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지역감정으로 갈라서기 시작한 경상도와 전라도의 화합을 내포한 '화개장터'라는 곡을 불렀다. 참고로 그는 작곡만 했고 작사는 친구인 김한길 전 의원이 했는데, 그 친구는 다른 쪽으로 유명해졌다. 1945년 5월 13일(음력 1945년 4월 2일), 황해도 평산군[5]에서 태어나, 1.4 후퇴의 피난 행렬에 섞여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이주했다.
조영남은 용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성악과에 입학했다. 그러다가 1962년에 한양대학교를 자퇴하였는데, 자퇴의 이유가 재밌다. 2013년 10월에 방송된 SBS '좋은 아침'에 조영남은 한양대 성악과 후배 김승일과 함께 출연하여, 한양대를 자퇴한 이유를 설명하며 "2학년이 됐는데 신입생 여자 아이들 중에 정말 예쁜 여자가 들어왔었다. 그 여자가 한양대학교에 오는 걸 매일 몰래 봤다. 걔가 입학한 후로 온 정신은 '그 애와 어떻게 이야기를 할까'였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내가 사회를 보면서 걔를 의식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약혼자가 있는 여자였다. 학교에서 그 여자와 내가 데이트 한다는 소문이 났고 약혼자가 날 찾아오기까지 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리고 조영남은 "학교에 퍼진 소문 때문에 자퇴하게 됐다. 다시 공부해서 서울대에 갔고 그 여자는 파혼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2015년 10월 방송된 MBN '속풀이쇼 동치미'에 출연해서는 한양대 자퇴에 대해 "잘렸다"는 말을 하였다. 즉 이날 방송에서 조영남은 "내가 한양대학교에 다니다 뜨거운 연애를 하고 잘린 적이 있다"고 말하였는데, 이에 출연진들이 "연애를 한다고 학교를 잘리냐?"며 의아해했고, 조영남은 "약혼한 여자와 눈이 맞은 거였다. 그 때는 내가 전액장학금을 받는 학생이었으니까 그러면 안 되는데…. 예쁜 걸 어떻게 하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자퇴서를 냈다. 이후 공부를 해서 다시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후 1964년에 서울대학교 성악과에 입학하였는데, 1968년까지 다니다가 서울대 성악과도 이후 자퇴하였다. 다만, 2000년대 들어 서울대학교 측에서 조영남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 서울대학교 자퇴의 이유에 대해 조영남은 2010년 9월 방송된 ‘황금어장 라디오 스타’에 출연하여 “서울대 음대를 다니던 중 미8군 오디션을 보고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깜짝 놀랄 만큼 수입이 좋아 더 이상 학교 다닐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해서 자퇴했다”고 밝혔다. 조영남은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밤무대를 전전하다 주한미군이 운용하는 쇼룸에서 팝송을 부르다 성악을 그만두고 상업가수의 벌이가 좋은 것을 이유로 상업가수로 전환, 1968년에 '딜라일라'라는 번안곡으로 데뷔한다.
이 딜라일라로 방송에 데뷔했는데,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데뷔하자마자 굉장한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본인도 본인 저서나 출연방송에서 본인은 거의 무명 시절은 없었던 편이라 회고하곤 한다. 이후 텔레비전이 지금처럼 절대적인 대중매체가 되기 전 시절이었음에도 TV에 자주 나와 TV를 자주 못 보던 서민들도 가수 조영남을 아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사실 지금 젊은 층은 (조영남의) 히트곡이라고 하면 화개장터 외에는 아는 노래가 없지만, 조영남과 같은 세대거나 그보다 더 나이 많은 윗세대 어르신들의 경우 1970년대 유명하던 대중 클래식 가수였다고(실제로는 번안 스탠다드팝 가수지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어쨌거나 유명했다는 건 사실이지만,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는 대부분 잘 모른다는 것은 팩트다. 어차피 70년대 최고 인기까지는 아니었으니... 그때 진짜 최고는 오히려 나훈아였다. 1980년대에는 조용필이 다 쓸어버렸고, 이후로는 이문세나 변진섭 같은 발라드왕들도 튀어나왔으니, 대중음악매니아가 아니고서야 조영남 노래까지 기억할 메모리는 부족하다. 1970년대 LP로만 음반을 발매하던 시절에 7만 5천 장을 팔았다고 하니 1990년대 기준이면 밀리언셀러 못지 않은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한 인기 가수인 것.
스타가 되어 돈을 벌고 좀 먹고 살 만해진 뒤엔 본인이 한때의 굶주림에 상업가수로 전향한 것을 후회했는지 동생인 조영수가 성악가가 되길 원하자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었다고 한다.
윤여정과 결혼
1971년, 군생활 도중 알게 된 배우 윤여정과 결혼한 후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주도한 여의도 평화집회에서 성악 쪽 담당자들을 수소문하고 직접 지휘한 후 빌리 그레이엄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 신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가수로 돌아오면서 활동도 왕성했지만, 집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끝내는 윤여정과도 갈라섰다. 스스로도 윤여정과 갈라섰을 때를 매우 반성하지만, 진심으로 윤여정을 위한다면 윤여정의 'ㅇ'조차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는 여론이 대다수다. 사실 조영남은 옛날부터 악명높은 바람둥이였는데, 결혼하고도 그 버릇을 통 고치지 못했다. 그런데다가 돈도 한 푼도 벌지 않았다. 오죽하면 쌀독에 쌀이 없던 날이 있던 날보다 많았다고 했을 정도다. 그래도 윤여정은 결혼생활동안 조영남에게 헌신적이었고, 7~80년대 미국에서 두부 구하기가 어렵던 시절 두부를 좋아하던 조영남을 위해 직접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 정도였다고 한다.
무릎팍도사 윤여정 편을 보면 알듯이 윤여정에게는 이게 엄청난 트라우마다. 실제로 관련이 있는 이야기가 나왔는데도 조영남의 'ㅈ'조차도 꺼내지 않았으며, 그 기세등등한 강호동과 유세윤도 몸 둘 바를 모른 채 진행을 했을 정도. 물론, 조영남 본인도 직접 "그녀가 입을 열었다면 조영남이란 사람은 사회에서 매장당했을 것"이라며 잘못을 시인했다. 그래놓고는 나중에는 윤여정이 못생겨서 같이 잘 수 없다는 초특급 망언을 했다. 일단 당신부터 거울이나 보쇼!
지금이야 양원경처럼 결혼 생활 내내 개막장 짓거리를 저질렀다거나, 송종국처럼 불륜(간통)을 저질렀다거나 하는 등의 예들처럼 어마무시한 사고를 친 것이 아닌 이상, (이혼에 대한) 인식은 제대로 잡혀서 이혼하고도 누구든 응원을 받는 경우가 많지만, 저때 이혼이라는 건 여자 연예인들에게 있어서는 마약 복용 같은 수위 높은 사고를 저지른 후 브라운관에 복귀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동급으로 여겨졌을 만큼 사회에서 매장당할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다. 아 현정아, 내 때는 예수재림이었어! 조영남과 이혼을 했던 윤여정 역시 그 때문에 매장당할 뻔했지만, 본인과 가까웠던 김수현 덕분에 생활연기인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재기에 성공했다. 이러니까 조영남의 'ㅈ'만 들어도 경기할 만큼 증오하는 것은 당연지사. 윤여정에게는 당장 지우고 싶은 악몽이 바로 그 때다. 그런데도 조영남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을 때를 "첫번째 결혼시절"이라고 말한다. 온갖 쓰레기짓을 다 하고 살았으니 잘도 편했겠지! 윤여정, 그리고 아들과 함께 지냈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는 말과 함께 당시 세 가족이 함께 찍었던 사진을 이용하여 미술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하여간 조영남은 이혼 후에도 정신 없을 정도로 수많은 여자들과 엽색 행각을 벌였으며, 1980년대에는 자주 여성지에 이름이 올라왔다. 그리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자신은 자유로운 정신으로서의 자유 연애, 결혼 제도에 대한 실험이라며 되도 않는 변명을 하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그냥 쓰레기 같은 할배. 이 사람 이상의 개막장은 임택근 정도가 있다. 조영남이 한 시대를 풍미한 대가수임에도 불구하고 대중들로부터, 특히 중장년층 어르신들에게 평판이 극도로 나쁜 이유도 다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젊은 세대한테 이미지가 좋냐면 그것도 절대로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지금껏 계속 방송에 잘도 나왔었는지 아이러니할 따름.
가수 은퇴 후 활동
이혼 후에는 방송에 인생을 올인하여 체험 삶의 현장으로 대표되는 체험 다큐 형태의 방송을 이끌었으며, 2006년부터 2016년 5월 23일까지 MBC 표준FM의 오후4시 ~ 오후6시 라디오 프로그램 <지금은 라디오시대> DJ를 맡았다.
보조 MC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는데 미국에서 MC로 성공한 자니 윤을 불러와서 그를 메인 MC로 한 '자니윤 쇼'에 조영남이 보조MC를 맡았는데 두 사람의 호흡이 너무 잘맞아서 큰 인기를 끌었다. 가수 쪽은 공식적인 은퇴 앨범을 낸 만큼 폐업 상태이나 프로그램의 PD들이 찾아와 사정을 하면 한두 곡 정도는 불러준다. '화개장터' 는 자기 스스로도 쪽팔려서 안 부르는 편. 결국 데뷔곡인 '딜라일라'를 우려먹고 있다.[16] 하지만 은퇴했으니 개런티는 공짜나 기부한다는 조건으로 안 받고 있다.
한국 연예인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이자 재산가이다. 그가 살고 있는 청담동 고급 빌라는 연예인이 살고 있는 집 중 제일 비싸다고 하며, 공시지가만 50억 원 이상, 실거래가는 100억 원이 훨씬 넘는다고... 사실 그 고급 빌라는 조영남이 아주 오래 전 구입한 것으로, 구입 당시에는 그리 고가가 아니었으나 재건축만 2번을 거듭하다보니 주변 시세와 맞물려 건물 가격이 폭등한 것. 게다가 집값이 너무 비싸다 보니 팔리지도 않는다고 한다. 물론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실제로 정말 작정하고 돈을 모았으면 지금의 재산 따위 푼돈으로 여길 정도로 엄청난 갑부가 되었겠지만 전술한 바람기를 바탕으로 한 방탕한 생활로 인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들한테 돈을 거의 뿌리다시피 하면서 재산을 홀라당 까먹기가 일상다반사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인기가 좋아서 돈을 엄청 잘 벌어서 저런 재산가가 된 것이다. 특히 재건축을 거듭할때마다 그 집을 팔라는 요구는 있었는데, 본인은 그 집 자체가 좋아서 그걸 지키고 싶어 안 팔았다고 한다.
은퇴 이후에는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주로 그리는 게 화투 그림을 크게 확대한 그림이다. 아무튼 이 화가 타이틀로 개인전도 여러 차례 열었고 KBS 시사교양 프로그램 명작 스캔들에서 미학 칼럼니스트 기믹으로 출연도 했다. 하지만 괜히 조영남이 아닌지라 사건사고 문서에서 설명하듯 큰 사건을 또 일으켰다. 이런저런 안 좋은 행각들이 크게 알려진 뒤론, 그의 취급은 거의 범죄자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 자리를 지키고 싶었다면, 품위있는 행동을 했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려준 인물.
가창력에 관하여
목소리가 아주 빼어나다. 과거부터 그는 쩌렁쩌렁한 성량과 정확한 음정, 박자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윤여정도 인정한다는 조영남 노래실력
준수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한 우렁찬 발성이 그의 가창력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클래식 창법을 베이스로 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게 대중음악의 장점을 접목한 보컬을 가지고 있는데 실제 조영남은 노래가 아닌 그냥 하는 말을 들어봐도 목소리가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즉석에서 편곡이나 애드립을 하는데, 공연 직전에 갑자기 곡을 바꿀 일이 생기면 자기가 평소에 외우는 다른 곡의 악보를 급하게 자기 손으로 써서 밴드에게 주는 경우도 있었다. 음악적 감각이 약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애드립으로 노래 도중 엇박이나 음을 바꾸는 기교를 보여주는데, 자세히 들어보면 이탈할랑 말랑 하면서도 끝내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성악 공부로 인해 코드 진행, 멜로디와 화성에 대한 이해가 우수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게 생각보다 매우 어려운 부분인데, 실제로 가창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많은 가수들도 콘서트 같은 공연에서 기교를 부리다가 조절을 못 해서 아예 음정이나 리듬이 3~4단계씩 확 빗나가 버리는 사례도 많다. 음이탈은 덤이고... 반대로 조영남이랑 비슷한 또래의 연예인들이 특별손님의 형식으로 조영남 공연에 출연해 조영남 모창을 위해 고의로 엇박을 넣었다가 마무리까지 박자를 못잡고 날려버리기도 했다. 조영남 식의 창법이 결코 쉬운 게 아닌 것이다. 조영남이 그 나이에도 흔들리지 않는 음감을 보유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소싯적부터 그는 트로트 가수들의 가창력을 비판하기를 좋아했는데, 가창력에 있어서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이 중론. 스탠더드 팝이 유행이었던 시절, 조영남은 미군들이 좋아할 만한 목소리를 가진 가수로 꼽혔고 당시 미군들에게 American Voice로 선호받던 가수였다. '딜라일라'를 비롯한 번안곡이나 팝송 역시 성악을 베이스로 한 쩌렁쩌렁한 성량으로 힘차게 소화하였다. 그래서 한국의 톰 존스라고 불리웠고 실제로도 그에 손색이 없는 수준. 지금도 조영남과 비슷한 연배이거나 7080세대의 어르신들은 "조영남이가 노래 하나는 참 멋지게 불렀지." 라는 식으로 왕년의 조영남을 팝과 클래식에 뛰어났던 가수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이유로 그가 진행하는 디너쇼는 아직까지 티켓파워가 있다.
이 덕에 매우 풍족한 생활을 유지하면서 성악의 길을 그만 두고 대중가수로서의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미군 부대에서 한 달간 벌어 들이는 수입이 당시 한 학기 대학 등록금과 맞먹는 수준이었고, 당대의 문화 아이콘으로 등극했었다고 한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지만 예술인들이 어지간해서는 먹고 살기 힘들 때였는데 본인의 수입은 당대 최고 수준이였기에, 가진 자의 여유로 동생들에게 많이 베풀어서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조영남을 많이들 따랐다고 한다. 당시에는 미 8군 부대에서 노래하는 것이 다른 그 어떤 무대보다도 높은 수입을 보장해줄 때였는데, 그 중에서도 조영남은 미군들로부터 가장 미국적인 목소리로 평가받는 인물이었으니 당연지사.
하지만 이미 스탠더드 팝의 시대는 끝났고 성악 특유의 톤을 진정성이 없다거나 작위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현재의 풍토이기에 그런 점에서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은 나올 만하다. 예능용 멘션이긴 했지만, 본인도 자신의 창법이 대다수의 대중들이 좋아할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라 세련된 대중가요와는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종래 조영남의 가창력 기반은 현란한 기교나 힘조절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에너지를 잃지 않고 뚝심있게 음을 질러서 울리는 방식으로 감정의 흐름을 관객석 끝까지 온전하게 밀어붙이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조영남은 순수하게 타고난 힘을 앞세운, 그야말로 뜨겁고 우렁찬 노래로 성공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성악톤의 스탠다드 팝이라는 장르로 큰 인기를 얻은 원천이었다. 이처럼 성악톤을 이용하는 방식 자체는 힘있는 발성을 기본으로 해야 감동이 커지는데, 현재 나이가 든 조영남은 젊을 때보다야 확실히 힘이 약해져 그만의 노래맛이 떨어진 감이 있다. 사실 이건 음악적 재능과는 무관하게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다. 혹시나 조영남이 운동과 식이조절로 벌크업을 하고 힘을 키워서 젊었을 때의 파워를 유지하고자 노력했었다면 조금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본인이 그렇게까지 죽어라 노력하지는 않았다.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조영남이라는 인물이 일생에 걸쳐 크고 작은 사고를 치고있지만, 가수라는 본업의 실력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지가 없고 예술적 재능이 풍부한 사람인 것도 사실이기에 연예계에서 롱런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보면 적당하다. 본인도 자신의 예술적 재능에 대한 자부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는 한다. 조영남의 작곡 능력은 평범한 편이다. 길옥윤 등의 당시 작곡가들에게 공개적으로 비판을 당한 적도 있고 본인도 곡은 쓰는데 영 생각만큼 안 나온다는 이야기를 자주 할 정도. 음악적으로도 번안곡 가수의 한계점 역시 많은 부분에서 보인다. 애초에 그의 히트곡 대부분은 자기 노래가 아닌 남의 노래를 그대로 가져다가 가사만 한국어로 바꾼 것이다. 다만, 불멸의 히트곡 화개장터가 있으니 작곡가로서 완전히 꽝은 아니고 대한민국의 인기가수로서 체면치레 정도는 한 셈.
클래식에 대한 조예는 깊을지 모르나 대중가요에 대한 이해는 몹시 부족해서, 싱어로만 살기에는 본인의 재능이 아깝고 싱어송라이터를 겸하기에는 다소 부족하다는 평가로, 세시봉 등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뉴 웨이브' 의 한 축 내지는 아이콘까지는 갈 수 있지만 그나마도 김민기, 송창식이라는 뛰어난 송라이터들 때문에 빛이 바랠 수밖에 없는 것. 김민기와 송창식, (그리고 평가는 이들에게 살짝 못미치지만) 양희은 등이 세시봉의 한계였던 번안곡, 포크에 한정된 음악성,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나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뛰어난 음악세계를 이루어 내는 데 성공했음을 고려한다면 그는 그야말로 '노래 잘하는 가수'에서 멈춘 셈이다.
트리비아
과거에 에버랜드의 시설 중 하나인 지구마을의 노래도 조영남이 불렀다는 말이 있었다. 사실 해당 곡은 윤석중이 작사, 김규환이 작곡했다고 나온다. 아마 행사 때 부르거나 했던 게 와전된 듯 한데 에버컴티에서 한 회원이 지구마을 개장당시 나눠줬던 지구마을 LP판을 보면 작사는 윤석중,작곡은 김규환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가수로는 조영남이 참여했다고 표기되어 있어 사실이다.
보통 가수들이 세상을 떠나면 장례식에서 그 가수의 유명한 노래를 불러주는 게 관례인데, 조영남은 이것 때문에 난감하다고 토크쇼에서 말한 바 있다. 즉,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부를 노래는 보나마나 공전절후의 히트곡인 '화개장터'일 텐데 가사부터가 '구경한번 와보세요' 로 장례식 분위기 완전 엎어놓을 노래이다 보니... 더 웃긴 건 그보다 더한 가수도 있을 뻔했었다는 사실. 바로 즐거운 잔칫날(잔치잔치 벌렸네~ 로 시작하는 그 노래)로 유명한 블루벨스 중창단 이야기다. 2001년 원로가수 고운봉 장례식에 왔던 원로 코미디언 남보원이 장례식장에서 했던 말. 그래서 이후 조영남은 자신의 장례식 때 불러달라는 곡을 직접 만들었다... 는데 사실 '모란동백'은 조영남이 만든 노래가 아니다. 원래 있던 곡을 리메이크한 것. 그런데 놀러와에서는 자기가 만들었다고 개드립을 쳤다. 근데 꼭 자기가 만들었다고 한 것이 아니라 뉘앙스가 "나 죽으면 이거 불러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부른 노래임" 으로 들리기는 했다. 그렇다면 이번엔 최 진사댁 셋째 딸인가?
이경규의 몰래카메라에 당한 적이 있으며 마라톤 대회에서 같이 달린 사람들은 이게 몰래카메라인지 알고 쉬엄쉬엄 달렸을 때 자기 혼자만 죽어라 뛰었다. 응원하던 다른 연예인들(동기 및 코미디언들)이 응원 플래카드를 들고 조영남 이름을 불렀는데 그 플래카드 앞에는 '필승'이란 격려 문구가 적혀 있었지만 그 플래카드들을 뒤집자 '완전히 돌았군!' 같은 말들로 반전을 보여줬으며 물론 시청자들만 보게 만들었다. 경규옹 정의구현.
결승선을 통과하여 축하하는 폭죽을 터뜨리면서 '몰래카메라에 속으셨습니다~' 현수막이 내걸렸는데 본인은 숨이 가뻐서 헥헥거리느라 그걸 보지도 못했고 이경규와 다른 사람들이 저거 보라고 한 다음에야 그걸 보더니만 정말로 열 터져서 이경규 등짝을 때리면서 "야... 난 죽어라 달렸어!"라며 열 터지는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몇년 뒤 제대로 다시 만나게 되는데... 조영남 몰래카메라.
어떤 코미디 프로그램에선 이주일과 함께 나왔는데, 둘 다 타이즈를 입고 타이즈 안에 커다란 포탄을 넣고선 사타구니 쪽이 묵직하게 축 늘어진 것을 보여주며 웃기기도 했다. 이주일이 생전에 유일하게 외모로 우위(?)를 점했던 인물이었다. 당시 극장식당에 출연해 그의 얼굴을 본 어린아이가 울자 이주일이 한 촌철살인 멘트는 압권. 자세한 것은 이주일 문서로...
또 다른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조영남 노래를 코미디 뮤직 비디오로 만든 것에서 도시로 온 시골 총각을 연기했는데 서울 와서 구두닦이로 일하는데 어느 꼬마아이가 운동화 닦아달라고 발을 내밀자 어이없다는 듯이 보다가 구두약 묻은 손으로 아이 볼을 꼬집는다. 그러다가 이를 본 아이 아빠가 화내면서 구두약을 조영남 얼굴에 된통 칠하는 보복을 당했으며 MBC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최병서 및 배일집 같은 코미디언들과 코미디 연기도 한 바 있다.
위에도 잠깐씩 얘기가 나왔지만, 책을 여러 권 냈고, 잡지에 신변잡기에 가까운 칼럼을 장기 기고하기도 했다. 글재주도 준수해서 맛깔스럽게 잘 쓰는 편이다. 글 내용 중 검증되지 않은 내용, 자기 자랑이 많이 들어가서 그렇지... 당연하지만 저건 칼럼이 절대 아니다. 군대 시절 조영남은 육군본부에서 행정병으로 근무를 했다. 근데 웃긴건 자기 대학교 동창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본인의 중대장으로 있는 바람에 되려 꿀이란 꿀은 죄다 빨고 편하게 군복무를 하다 왔다고.
진짜 의외의 사실인데 건설안전 노래를 불렀다. 노가다를 하는 사람들은 아침마다 아주 지겹도록 듣는 노래 중 하나이다. 무재해 깃발 아래 산업안전 생활하여... 이 인간은 존재 자체가 코메디다. 2014년에 당시 26년 만에 신곡 통일바보를 발표했다. 일본에 조영남과 비슷한 행보를 보인 인물로 콘도 마사히코가 있는데, 이 사람도 조영남이 데뷔한 지 1년이 되는 해에 태어났다.
성추행 논란
2011년 9월 21일 방영된 빅 브라더스에서 게스트로 소녀시대가 나왔는데, 멤버들을 포옹하는 과정에서 유독 태연만 강하게 끌어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는 논란이 퍼지기도 했다. 소덕들 분노 타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이차만 3배나 나는 후배 여가수를 상대로 부적절한 행동이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다만, 프로그램 자체가 파일럿 프로그램이라 주목도가 높지 못했는지 이후 별다른 해명이나 추가 논란도 없이 잊혀졌다. 2013년에는 섹션TV 연예통신 리포터로 집에 방문한 서유리가 "친분을 통해서 작품을 더 싸게 살 수도 있느냐?"라는 말에 내 여자친구나 애인이 되면 가능하다라는 말이나 장모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며 추파를 던졌다. (포옹하는 사진도 있다) 허나 서유리가 당시 지금에 비하면 낮은 인지도를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큰 논란이 되지는 않은 듯 하다.
2014년 4월엔 연예가중계 촬영차 리포터 자격으로 집에 찾아온 레인보우의 멤버 김지숙에게 결혼하자며 치근덕대어 많은 비판을 받았다. 뒤늦게 지숙의 나이를 알고 했던 말을 취소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촬영분을 보면 결혼 얘기에 표정이 굳으면서 슬슬 피하는 지숙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한달 후에 가족의 품격 풀하우스에 출연하여 해명을 했으나, 그게 그거라는 핀잔 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2015년 10월 16일 방영된 나를 돌아봐에서는 이번엔 제시에게 1년 전 김지숙에게 했던 망언을 하였다[8]. 당연히 이를 접한 이들은 또 다시 조영남을 거세게 비난하였으며, 또한 제시의 생방송 무대인데 가사도 제대로 안 외워오고 직전에 말을 자꾸만 바꾸는 모습에도 아무리 본인이 선배라 해도 무례하다며 비판했다. 또 바로 옆에 탈의실이 있다는 걸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앞에서 바지 지퍼를 풀고 윗옷을 다 벗기도 했는데, 그곳에 제시와 여성 백댄서, 카메라가 있었다. 2015년 11월 20일 방영된 나를 돌아봐에서 가면을 쓴 여성에게 '이혼한 남자가 어떠냐'는 큰 실례가 되는 질문을 했다. 결국 그는 김수미와 함께 26회 (2016년 1월 22일 방송분) 를 끝으로 같이 하차했다.
2016년 1월에 방영된 나를 돌아봐에서는 이번엔 트와이스의 쯔위가 방송소감으로 즐거웠어요라는 말을 한국어 미숙으로 인해 지겨웠어요라고 잘못 말하자 모두가 빵 터지고 잭슨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틈을 타 입 쩍쩍 벌리고 웃으며 끌어안으려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이 때 이런 조영남의 흑심을 캐치한 경규옹은 당황하는 척 하면서 조영남을 제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끝까지 테이블에서 불쑥 기어나와 분위기 타려다가 쯔위가 "즐거웠어요!"라는 말로 마무리를 지으면서 실패했다. 이때도 즐거웠다는 말을 꺼내기 전 조영남을 마주본 쯔위가 크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시청자들은 '다 된 개그 컷에 조영남 뿌리기'라는 반응을 보였다. 참고로 조영남과 쯔위의 나이차는 6년이 빠진 환갑이며, 조영남이 환갑 때 쯔위는 고작 유치원생이었다는 뜻이다.
입양딸 성추행 논란
잡지 신동아에 실렸던 인터뷰 중에 입양한 딸의 가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해당 인터뷰; 이 인터뷰는 책으로도 출판되었다) 발언은 다음과 같다:
"엄청 사정해야 한 번 보여줄까 말깐데 증~ 말 예뻐. 환상적이라구. 그렇게 성스럽고 아름다운 걸 브래지어 속에 꼭꼭 숨기고 다녀야 하다니... 참 여자들은 이상해. 한참 예쁠 땐 절대 안 보여주다 늙어서는 언제 그랬나 싶게 간수들을 안 하잖아. 이거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일 아냐"
결국 몇 번을 사정해서 봤다는 것인데, 이 기사가 실렸을 때 입양한 딸은 15살이었다.
앨범
정규 앨범
1 《내사랑 딜라일라》
발매일 : 1970년
편곡:김인배
딜라일라 (조영남)
빗줄기의 리듬 (이시스터즈)
쌘프라시스코에서는 머리에 꽃을 꼿고 (조영남)
사랑의 기쁨 (한상일)
Come See About Me (Little Sisters)
밤비나 밤비나 (최양숙)
Am I That Easy To Forget (조영남)
Yesterday (조영남)
어쩌면 좋을까요 (박연숙)
사랑하는 마음 (최양숙)
사랑은 기차를 타고 (케리부룩)
2 《趙英男 2집》
발매일 : 1972년 12월 5일
옛생각
이일병과 이쁜이
보리밭
떠나는 마음
오솔길
꿈은 사라지고 (안다성, 시온성 합창단 1958)
딜라일라
고향의 푸른잔디
선구자
웨딩드레스 (한상일 1969)
세노야 (양희은 1971)
눈물젖은 두만강(김정구 1938)
3 《사랑이란》
발매일 : 1978년 8월 27일
살사랑이란
난 너를 사랑해
제비
아베마리아 (Ave Maria)
바위고개
안녕
사랑이란
슈우베르트의 세레나데
내 생에 단 한번만
사랑의 기쁨 (Piacer D`Amor)
4 《趙英男 4집》
발매일 : 1979년 10월 30일
삽다리
아들
참사랑
사랑의 바람
제비
잊어야 해
인생
안녕
하늘 가는 밝은 길이 (성가)
산이슬 (건전가요)
5 《趙英男 5집》
발매일 : 1982년 3월 30일
점이
누가 이 여인에게
님이시여
제비
여름은 가고
겨울에 떠난 여인
여보
모정은 가득히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남궁옥분 1988)
미련
사랑 (찬송가)
전우가 남긴 한마디(허성희 1978)
6 《趙英男 6집》
발매일 : 1982년
이별
서울
고향의 푸른잔디
선구자
내 생에 단 한번만
옛생각
그 얼굴에 햇살을(문정선 1972,이용복 1972)
등대지기
눈물젖은 두만강
제비
너
보리밭
이일병과 이쁜이
떠나는 마음
내집에 가고 싶네
오솔길
꿈은 사라지고
아! 대한민국(정수라, 장계현 1983)
7 《`86 Asia Singer》
발매일 : 1985년
지금
비둘기
이길수 있어요
운전기사의 노래
밀알 하나가
너는 예뻐
철없는 아내(차도균 1967(?))
모두다 즐겁게
바우고개
마지막 편지(여의성 1969(?))
지금
아! 대한민국
8 《한강》
발매일 : 1988년
한강
사랑없인 난 못살아요
Welcome To Seoul Korea
이대로가 좋아요
아리랑
화개장터
사랑했기에
돌아와요 부산항에(조용필 1976)
그건 너
비는 내리고
온국민이 함께 부르는 노래
9 《조영남 `91》
발매일 : 1991년 6월 30일
도시여 안녕
서시
사랑없인 난 못살아요
지금
낙엽은 지는데
겸손은 힘들어
그대 따르리
화개장터
제비
딜라일라
10 《`94 조영남》
발매일 : 1994년 1월 1일
카루소
만남
그대 그리고 나
사랑의 미로(태원 1976, 최진희 1983)
사랑이여
서시
떠나가는 배
김군에 관한 추억
바위고개
고향생각
11 《밀레니엄 앨범》
발매일 : 1999년 9월 1일
에루화
고독한 계절
뉴 밀레니엄
청산은 나를 보고
지금
만남(노사연 1989)
제비
낙엽은 지는데
도시여 안녕
사랑이여
사랑의 미로(최진희 1984)
화개장터
그대 그리고 나(소리새 1988)
선구자
기다리는 마음
내 고향 충청도
12 《은퇴의 노래》
발매일 : 2001년 4월 28일
은퇴의 노래
우리사랑
모란동백(이제하 1991)
딸이야기
사랑없인 난 못살아요
언약
金君
비는 내리고
솔로의 노래
여기는 대한민국
제비
한강
그대 그리고 나 (Bonus Track)
13 《남자 조영남 노래 그리고 인생》
발매일 : 2010년 12월 2일
나는 신의 뜻을 알고 싶다
참으로 꿈만 같아라
사랑의 이중창
간절대박
눈동자
파리 공원의 아침
무반주 발라드
정주고 내가 우네(박일남 1966)
어허라 사랑(주현미 2005(?))
외롭지 않으려면
사막의 전갈
나도 이젠 네가 싫다
출연작
2020년 SBS 교양 프로그램《궁금한 이야기 Y》- 게스트
2015년 KBS 예능 프로그램《나를 돌아봐》- 진행
2013년 TV조선 예능 프로그램《낭만논객》- 진행
2013년 KBS 특집 프로그램《스타 베이비시티 날 보러 와요》- 진행
2013년 KBS 예능 프로그램《이야기쇼 두드림》- 진행
2011년 KBS 예능 프로그램《빅 브라더스》- 진행
2011년 KBS 교양 프로그램《명작 스캔들》- 진행
2010년 KBS 특집 프로그램《조영남과 친구들》 - 진행
1999년, 2000년 KBS 예능 프로그램《가족오락관》- 게스트
2000년 KBS 교양 프로그램《체험 삶의 현장》- 진행
2000년 KBS 교양 프로그램《조영남이 만난 사람》- 진행
1998년 KBS 교양 프로그램《조영남, 황현정의 이야기 콘서트》- 진행
1997년 KBS 교양 프로그램《밤의이야기쇼》- 진행
1996년 KBS 교양 프로그램《TV는 사랑을 싣고》- 게스트
1993년 SBS 교양 프로그램《투맨 쇼》- 진행
1993년 KBS 교양 프로그램《체험 삶의 현장》- 진행
1993년 KBS 예능 프로그램《조영남쇼》 - 진행
1992년 KBS 예능 프로그램《생방송 토요스페셜》- 진행
1989년 KBS 예능 프로그램《자니윤 쇼》- 진행
1979년 TBC 예능 프로그램《조영남 TV스페셜》- 진행
드라마 출연작
2016년 KBS 1TV 다문화 특집 드라마 《반짝반짝 작은 별》 - 이태원 초등학교 교장 역
1987년 MBC 8.15 특집 드라마《한힌샘》- 독립신문 인쇄공 역
라디오 진행작
2006년 ~ 2016년 MBC 표준FM 《조영남,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 진행
1973년 MBC 표준FM 《[별이 빛나는 밤에]]》 - 진행
기타 활동
1997년 한국화랑미술제 이목화랑 초대전 (예술의 전당)
1996년 서울대 음악대 동문회 명예회원
1991년 뉴욕 카네기홀 콘서트
광고
2011년 SK텔레콤 T store (With. 아이유)
1997년 부광약품 타코나
1993년 SK바이오팜 기넥신 (With. 남궁원, 현미, 손숙
1993년 대웅제약 우루사 에프 (With. 백일섭)
1989년 JW중외제약 스로링
1988년 우성식품 블루 다이아몬드
1988년 빙그레 엑설런트
1983년 농심 뿅뿅 컵면
1979년 ~ 1982년 한독 브론치쿰 (With. 김상순)
1976년 해태Htb 써니텐
저서
2012년 《그녀 패티 김 - 열정 그 자체 패티김의 노래와 삶》
2011년 《쎄시봉 시대 - 쎄시봉 친구들의 음악과 우정 이야기》
2010년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 - 내가 죽기 전에 꼭 쓰고 싶었던 시 해설서》
2009년 《천하제일의 잡놈 조영남의 수다》
2007년 《조영남의 사랑과 예술이야기》
2007년 《어느날 사랑이》
2007년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
2005년 《맞아 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
2004년 《강철이 집 어데고》
2003년 《조영남 길에서 미술을 만나다》
2003년 《태극기는 바람에 펄럭인다》
2002년 《조영남씬 천재예요》
2000년 《예수의 샅바를 잡다》
1995년 《놀멘 놀멘2》
1994년 《조아저씨 이야기》
1994년 《놀멘 놀멘1》
1993년 《삽다리를 아시나요》
1993년 《넌 노래를 부르지마》
1993년 《조영남의 양심학》
1988년 《한국 청년이 본 예수》
수상 경력
2003년 KBS 연예대상 공로상 (체험 삶의 현장)
2011년 MBC 방송연예대상 공로상
2010년 MBC 연기대상 라디오 MC 부문 최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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